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프로이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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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프로이센의 왕으로, 1786년부터 1797년까지 통치했다. 그는 예술 후원자였지만, 물질적 쾌락을 추구하는 인물이었다. 삼촌 프리드리히 2세의 영향으로 계몽주의 교육을 받았으나, 통치자로서의 자질에 대한 우려를 받기도 했다. 즉위 후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는 정책을 펼쳤고, 종교 개혁을 시도했다. 외교적으로는 프랑스 혁명에 대응하며 오스트리아 등과 동맹을 맺었으며, 폴란드 분할에 참여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문화 예술은 발전했으나, 신비주의에도 경도되었다. 그는 여러 정부를 두었으며, 사후에는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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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프로이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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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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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프로이센 국왕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
통치 기간 | 1786년 8월 17일 – 1797년 11월 16일 |
선임자 | 프리드리히 2세 |
후임자 |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
배우자 |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폰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주 (1765년 결혼, 1769년 이혼) 프리데리케 루이제 폰 헤센-다름슈타트 (1769년 결혼) 율리 폰 포스 (1787년 결혼, 1789년 사망, 귀천상혼) 조피 폰 되노프 (1790년 결혼, 1792년 별거, 귀천상혼) |
자녀 | 프레데리카 샬롯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루이 샤를 빌헬미네 아우구스타 하인리히 빌헬름 구스타프 아돌프 빌헬름 폰 잉엔하임 (사생아)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브란덴부르크 백작 (사생아) |
왕가 | 호엔촐레른 가문 |
아버지 | 아우구스트 빌헬름 폰 프로이센 |
어머니 | 루이제 폰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
출생일 | 1744년 9월 25일 |
출생 장소 | 베를린 왕궁, 프로이센 왕국 |
사망일 | 1797년 11월 16일 |
사망 장소 | 마르모어팔라이스, 포츠담, 프로이센 왕국 |
매장지 | 베를린 대성당 |
종교 | 칼뱅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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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
독일어 | Friedrich Wilhelm II |
2. 어린 시절
1744년 9월 25일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 베를린에서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와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루이제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삼촌(아우구스트 빌헬름의 형) 프리드리히 대왕은 자녀가 없었기에, 1758년 아우구스트 빌헬름이 사망했을 때 그의 아들이 추정 상속인이 되었다.
어린 시절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여유롭고 쾌락을 추구하는 소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혜로운 인물이자 예술, 특히 음악의 훌륭한 후원자였다. 루이지 보케리니,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루트비히 판 베토벤 등이 그가 좋아하는 음악가였다. 그는 유럽 전체에 걸쳐 명성을 얻은 사적인 오케스트라를 소유했고, 첼로 연주자이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의 예술적 추구를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그의 예술적 성향이 그를 유능한 통치자로 만들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반면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삼촌이 자신에게 외교와 행정을 가르칠 생각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1781년 그는 종교적 황홀경을 실행하는 신비주의에 심취하여 장미십자회에 가입하였다.
2. 1. 교육
1744년 9월 25일,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 베를린에서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와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루이제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녀가 없었던 백부 프리드리히 2세는 1744년에 자신의 바로 아래 동생이자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아버지인 아우구스트 빌헬름을 프로이센의 왕자로 지명했다.1747년, 프리드리히 2세는 세 살 된 조카를 베를린 황태자 궁전과 오라니엔부르크 궁전에 살고 있던 가족의 보살핌에서 데려왔다.[1] 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을 베를린 궁전으로 데려와 계몽주의 시대 정신에 입각한 교육을 결정하고, 네 살 된 조카를 위한 가정교사를 선택했다.[1]
니콜라스 드 베겔린이 국왕에 의해 이 역할을 수행하도록 선택되었다. 그는 이미 프리드리히 2세와 개인적인 접촉을 가졌고 그의 존경을 받았다.[1] 베겔린은 네 살과 다섯 살 된 왕자의 일상 생활을 엄격하게 규제했다. 아침에는 왕자가 유럽 궁정의 언어인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배웠다. 정오에는 궁정의 기사들을 초대하여 외교적 매너를 익히게 했다. 점심 식사 후에는 이미 다섯 살 때 읽고 쓸 수 있었으므로, 언어 수업이 필기 형태로 계속되었다.[4] 그 후에야 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간에도 그는 인형을 통해 배운 것을 연기해야 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끊임없이 교육에 개입했다. 예를 들어, 정오에 기사들을 만날때, 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길러지는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1] 그는 국왕의 가능한 후계자로서 프리드리히 2세의 의지에 따라 "드라이슈티히카이트(담대함)"를 통해 귀족들 사이에서 존경을 얻어야 했다. 다소 수줍어하는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삼촌의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아이의 행동과 매일 수행해야 하는 높은 기대는 걱정 없는 시간과 아이 친화적인 활동을 위한 공간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왕자가 특정 작업을 수행하고 싶어하지 않거나 반항적인 모습을 보이면, 베겔린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을 빼앗거나 심지어 그를 때리겠다고 위협했다.[1]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수학, 법학, 철학, 역사를 배웠다. 프리드리히 2세 아래에서 중요하고 주로 프랑스 학자들을 모았던 왕립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 회원들이 반복적으로 교육 멘토 역할을 했다. 미래의 국왕은 특히 그리스, 로마, 아시리아 및 유대 역사에 대한 탄탄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 때때로 베겔린은 왕자를 베를린의 공장, 작업장, 예술 스튜디오로 데려가는 소풍을 통해 수업을 완화했다.[1] 춤, 펜싱, 승마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그는 통치 군주의 국정에 대비할 수 있는 교육을 받지 못했다.
1751년, 국왕은 교양 있고 학식이 풍부한 하인리히 아드리안 폰 보르케 소령을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군사 훈련을 위해 선택했다.[5] 36세의 백작은 교육적 감수성을 거의 보여주지 않았다. 보르케가 아이의 진척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프리드리히 2세에게 정기적으로 써야 했던 보고서에 따르면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종종 반항적인 행동을 보였고, 그로 인해 매를 맞았다. 이것이 도움이 되지 않자, 보르케는 왕자에게 그의 어린 동생 하인리히와의 접촉을 금지했다.[1] 프리드리히 2세는 이러한 교육 방식을 승인했다. 1754년 8월 19일, 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베를린에서 포츠담으로, 그의 궁정으로 이주할 것을 요구했다. 국왕은 그 목적이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섬세하고 소심한 성격을 바꾸는 것이라고 말했다.
1758년 아우구스트 빌헬름이 사망했을 때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추정 상속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의 예술적 추구에 반대하였고 그의 예술적인 영혼은 그가 유능한 통치자가 되게 하지 않을 것을 믿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자신의 삼촌이 자신에게 외교와 행정부의 방향을 전혀 가르칠 생각을 한 적이 없던 것을 믿었다.
1781년 그는 종교적 황홀경을 실행하는 신비주의로 향하여 "장미십자회"에 가입하였다.
3. 프로이센 왕자
1744년 9월 25일,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 베를린에서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와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페르디난트 알브레히트 2세의 딸 루이제 아말리에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자녀가 없었기에, 1758년 아우구스트 빌헬름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추정 상속인이 되었다.
어린 시절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여유롭고 쾌락을 추구하는 성향을 보였다. 그는 물질적 쾌락을 사랑했지만, 예술, 특히 음악에 대한 훌륭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루이지 보케리니,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루트비히 판 베토벤 등이 그가 좋아하는 음악가들이었으며, 그는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친 사적인 오케스트라를 소유했고, 첼로 연주 실력도 뛰어났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조카의 예술적 취향을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그의 예술적 기질이 유능한 통치자가 되는 데 방해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1780년 러시아 왕궁으로의 비생산적인 기밀 사절을 포함한 다양한 임무에 프리드리히 빌헬름을 임명했지만, 그에게 외교와 행정에 대한 가르침은 전혀 주지 않았다.
1781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신비주의에 심취하여 장미십자회에 가입했다. 그는 요한 루돌프 폰 비쇼프스베르더와 요한 크리스토프 폰 뵐너의 영향을 받았는데, 프리드리히 2세는 뵐너를 "위험하고 흥미로운 성직자"라고 묘사했다.
3. 1. 프리드리히 2세와의 갈등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유년 시절부터 삼촌인 프리드리히 2세와 갈등을 겪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조카의 교육을 직접 감독하며 엄격한 규율을 적용했는데,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삼촌의 기대에 부응하기 어려웠고 자주 반항적인 모습을 보였다.[1]프리드리히 2세는 조카의 군사 훈련에도 관여하여 하인리히 아드리안 폰 보르케 소령을 군사 훈련 담당으로 임명했지만, 보르케 소령은 교육적 감수성이 부족했고,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훈련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5]
제3차 슐레지엔 전쟁과 7년 전쟁 (1756년–1763년)은 프리드리히 2세와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아버지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 사이의 긴장을 악화시켰다. 프리드리히 2세는 여러 차례의 실패에 대한 혐의로 그의 형제를 프로이센 육군에서 불명예스럽게 해임했는데, 일부 역사가들은 프리드리히 2세가 자신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동생을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주장한다.[1]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아버지가 사망한 후, 프리드리히 2세는 조카를 프로이센의 왕자로 임명하고 왕위 계승권을 확인시켰다.[1]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조카의 군사적 능력을 의심했고, 둘 사이의 관계는 냉각되었다.[5]
7년 전쟁 이후, 프리드리히 2세는 조카에게 공개적으로 굴욕을 주는 행동을 했다. 그는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가 왕위를 계승할 수 없다는 점에 유감을 표명하기도 했다.[5]
프리드리히 2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에게 정치와 행정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았다.[1]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삼촌이 자신에게 외교와 행정의 방향을 가르칠 생각이 없었다고 비난하며, 자신의 삼촌이 유능한 통치자로서 자신을 무능하게 만든 것에 대해 과실을 비난했다.
4. 즉위와 통치
1786년 8월 17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프로이센 왕국의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키는 여러 정책을 도입하여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프랑스 혁명의 여파가 자국으로 확산될 것을 우려하여,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2세와 회담을 갖고 필니츠 선언을 발표했다. 1795년에는 바젤 조약을 통해 프랑스 혁명 정부와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제2차, 제3차 폴란드 분할을 통해 바르샤바를 포함한 폴란드 중부의 광대한 영토를 획득하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왕세자 시절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와 결혼했으나, 간통을 이유로 이혼했다. 이후 프리데리케와 재혼하여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를 포함한 8명의 자녀를 두었다.
예술에 대한 이해도 깊어 이전까지 군사 국가였던 프로이센에서 독일 문화와 재능을 꽃피우도록 지원했다. 왕립 아카데미 회원에 독일인을 임명하고, 독일 연극을 지원했으며, 첼로를 배우는 등 음악 애호가이기도 했다. 베를린을 대국의 수도에 걸맞게 정비하도록 명령하여 브란덴부르크 문을 건설하기도 했다.
장미십자회의 일원으로 신비주의에 경도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4. 1. 국내 정책
1786년 8월 17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왕위에 오르자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는 여러 정책들을 시행하였다. 그는 삼촌인 프리드리히 대왕의 억압적인 프랑스식 세금 징수 제도를 개혁하고, 무역을 장려하기 위해 관세를 낮추고 도로와 운하를 건설하였다. 또한 커피, 설탕, 담배 산업에 대한 독점을 폐지하였다. 그러나 맥주, 밀가루, 설탕에 대한 소비세를 인상하여 수입 감소를 보충했다.[8][13]독일어 사용 금지 조치를 해제하고, 프로이센 학술원에 많은 독일 작가들을 초청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가 시작한 "프로이센 국가를 위한 일반 주법"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통치 기간인 1794년에 완성되었다.[9]
1786년 8월 26일, 뵐너를 재정 담당 추밀원으로 임명하고, 사실상 총리의 권한을 부여하였다. 뵐너는 국내 정세 전반에 관한 결정을 내리고, 왕국의 재정 및 경제 개혁을 추진하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비쇼프스베르더를 고문으로 임명하였는데, 공식 문서에 따르면 비쇼프스베르더는 단순 전공 직위만 보유했으나 1789년 부장으로 승진하였다.
뵐너에게 중요한 직책을 부여한 국왕의 결정은 많은 반대에 부딪혔지만, 뵐너는 1788년 7월 3일 국가 및 정의의 추밀원이 되었고, 루터교와 칼뱅교 관련 영적 부서의 우두머리로 임명되었다. 이 임명은 국가에 지속적인 종교 개혁을 가져왔고, 국왕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다.
1788년 7월 9일에 선언된 법안에 따르면, 개신교 목사들은 공식 문서에 언급되지 않은 내용을 가르칠 수 없었고, 교육 기관은 정통 성직자들의 감독을 받게 되었다. 이 법안의 목적은 기독교를 보호하고 프로이센을 안정적인 기독교 국가의 모범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4. 2. 외교 정책
18세기 외교는 최고 수준의 국가 통치술이자 절대 군주의 "주요 업무"로 여겨졌다.[10] 이에 따라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이 정치 분야에서 가장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10] 공식적으로 그는 전쟁과 평화를 혼자 결정했다.[10] 동맹 정치 면에서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했을 때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오스트리아-러시아 동맹 (1781),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신뢰성 부족, 그리고 1756년의 프랑스-오스트리아 동맹은 프로이센의 외교적 고립을 초래했다.[1] 프리드리히 2세 치하에서 이루었던 프로이센의 주요 강대국 지위를 공고히 하려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목표는 처음부터 심각한 위험에 처했다.[1] 무엇보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전쟁 장관 에발트 프리드리히 폰 헤르츠베르크는 왕에게 유럽 동맹 시스템의 변화를 기다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이를 가져오라고 요구했다.[1]대서양과 유럽 혁명은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외교 정책의 배경을 형성했다.[11] 근본적으로 앙시앵 레짐의 세계였던 그의 세계에서, 이 혁명들은 처음에 프로이센에게는 단지 멀리서 들리는 천둥 소리로만 보였다.[11] 그러나 특히 프랑스 혁명과 관련된 격변의 결과는 당시 예측할 수 없었다.
1786년 8월 17일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왕위에 올랐다. 그의 군사 개혁과 외교 정책들은 국가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프로이센 군대의 성장에 불구하고 국가가 부담하는 부채가 군사 훈련 프로그램들의 품질을 낮추었다. 그것은 또한 유럽 정세에 개입하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계획들에 장애였다.
충분한 자금의 부족은 프랑스 혁명이 국가에서 군주를 위험에 빠뜨렸을 때 1791년 8월 필니츠 궁전에서 레오폴트 2세와 그의 회의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프랑스의 루이 16세를 지지하는 데 동의하였다. 황제는 국왕의 예술적인 기질과 약한 프로이센의 재정 때문에 그의 약속에 믿음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92년 2월 7일 공식적인 오스트리아-프로이센 동맹이 맺어졌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그해와 1793년의 캠페인들에 참가하였다. 하지만 자금의 부족이 아직도 그를 괴롭혔다. 그의 상담들은 쇠퇴하는 폴란드의 정세에 의하여 산만했다.
1794년 4월 19일 헤이그에서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 맺어진 보조금 조약은 어느 정도 그의 국가의 재정을 향상시켰으나 조건으로 왔다. 재정 보조를 위한 교환에서 동맹은 64,000명의 지상군을 요구하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동시에 제1차 대프랑스 동맹에서 폴란드의 자신의 몫을 얻는 데 집착하였고 그 후에 냉담하게 전쟁에 참가하였다. 1795년 그는 동맹으로부터 참여를 철회하였고 프랑스와 바젤 조약을 맺었다. 1793년 분할을 따른 폴란드에서 반란과 러시아의 고립된 중재는 프랑스와 바젤 조약을 맺어야 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를 너무 위협하였다. 거대한 군주들은 그것이 배신에 해당했다고 자신들이 믿었고 유럽에서 프로이센을 보이콧 시키면서 프랑스와 동맹을 반대하였다.
프로이센은 1793년과 1795년 폴란드의 비용이 아닌 몇몇의 영토들을 얻었다. 게다가 국가는 거의 파산했고, 군대는 고갈되었고, 재정적 혼란이 우세하였으며 군주는 망신을 당했다. 1795년 제3차 폴란드 분할에 이어 프로이센이 얻은 영토들은 바르샤바 같은 거의 독일인 인구가 없던 지방들을 포함하였다. 이 일은 심하게 국가의 자원을 고갈시켰다. 이어진 친폴란드 반란이 국가에 추가적인 피해를 입혔다. 다른 얻어진 영토들 중에는 안스바흐와 바이로이트 (1791년), 단치히와 토른이 있었다.
4. 3. 신비주의 경도
1781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종교적 황홀경을 실행하는 신비주의에 경도되어 "장미십자회"라는 영혼적, 문화적 운동에 가입했다. 그 무렵 그는 요한 루돌프 폰 비쇼프스베르더와, 국왕이 "위험하고 흥미로운 성직자"로 묘사했던 프로이센의 목사이자 정치인 요한 크리스토프 폰 뵐너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17]뵐너는 왕국의 재정과 경제 개혁을 위해 일했으며, 국내 정세 전반에 관한 결정들을 내렸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비쇼프스베르더를 상담에 포함시켰으나, 공식적인 문서에 따르면 비쇼프스베르더는 단순 전공 직위를 보유했다. 비쇼프스베르더는 1789년 부장으로 승진했다.
국왕이 뵐너에게 중요한 위치를 부여한 결정은 큰 반대에 부딪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뵐너는 1788년 7월 3일 국가와 정의의 활동적 추밀원이 되었고, 루터교와 칼뱅교 정세를 위한 영적 부서의 우두머리로 임명되었다. 이 임명은 국가에서 오래 지속되는 종교 개혁을 가져왔고, 국왕의 큰 후원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9일 선언된 법안에 따르면, 개신교 목사들은 공식적인 책에서 언급되지 않은 내용을 가르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교육 기관들은 정통 성직자들의 감독을 받았다. 이 법안의 목적은 기독교를 보호하고 프로이센을 안정적인 기독교 국가의 전형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에게는 오컬트라는 또 다른 뚜렷한 특징이 있었다. 18세기 말, 계몽주의 시대에 불안해진 부르주아지와 귀족 계층은 신비주의적인 기독교적 경험을 찾고 있었다.[17] 공식 교회는 이러한 불확실성을 완화할 수 없었기에, 사람들은 장미십자회를 포함한 다양한 종교 단체로 눈을 돌렸다. 당시 장미십자회는 자신들이 죄, 욕망, 교만으로부터 사람들의 영혼을 해방하도록 신에게 선택받았다고 믿었다.[1]
독실한 신앙심을 가진 왕세자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이러한 이상에 열광하여 1781년에 장미십자회에 가입했다. 장미십자회의 주요 인물인 요한 크리스토프 폰 뵐너와 요한 루돌프 폰 비쇼프베르더는 왕세자를 자신들의 가르침에 동의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성적인 문제에 무관심했던 이전의 삶이 신성하지 않다고 강조함으로써,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정부였던 빌헬미네 엥케를 몰아낼 기회를 보았다.[18]
5. 사생활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여유롭고 선동적인 소년으로, 물질적 쾌락을 사랑하며 자랐다. 그럼에도 그는 지혜로운 남성이자 예술, 특히 음악의 훌륭한 후원자였다. 루이지 보케리니,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루트비히 판 베토벤 등이 그가 좋아하는 음악가였다. 그는 유럽 전체에 걸쳐 명성을 얻은 사적인 오케스트라를 소유했으며, 다작의 첼로 연주자이기도 했다.[7]
1781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종교적 황홀경을 실행하는 신비주의에 심취하여 장미십자회에 가입했다. 그는 요한 루돌프 폰 비쇼프스베르더와 요한 크리스토프 폰 뵐너의 영향을 받았다.
1744년 9월 25일,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 베를린에서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와 루이제 아말리에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백부 프리드리히 대왕에게는 자녀가 없었기에, 1758년 아우구스트 빌헬름이 사망하자 당시 14세였던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추정 상속인 (프로이센의 왕자) 지위를 계승했다. 그는 황제 교육을 받았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프리드리히 2세 역시 이 조카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1786년 8월 17일, 프리드리히 2세가 붕어하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쾌락주의자였지만, 단순한 속물은 아니었고 예술에 대한 이해도 보였다. 그전까지 무미건조하고 거친 군사 국가였던 프로이센에서 독일 문화와 재능을 꽃피웠다. 전원 프랑스인이었던 왕립 아카데미 회원에 독일인을 임명하고, 프랑스인에 의한 프랑스 극만 상연했던 극장에서 독일 연극을 지원했다. 그는 선왕 못지않은 음악 애호가이기도 했으며, 음악 총감독으로 고용한 프랑스 첼리스트 장-피에르 뒤포르에게 첼로를 배웠다. 그 외에도 베를린을 대국의 수도에 걸맞게 정비하도록 명령했고, 베를린의 상징 브란덴부르크 문을 건설했다. 선왕 시대에는 검소했던 궁정의 분위기가 일변하여 화려해졌지만, 국왕은 "'''뚱보 바람둥이'''"(der Vielgeliebte ("the much loved") und der dicke Lüderjahn ("the fat scallywag"))라고 불렸다.
1765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엘리자베트 크리스틴과 결혼했으나, 1769년 이혼했다. 같은 해 프리데리케 루이제와 재혼했다. 1769년부터 1782년까지 빌헬미네 엥케가 그의 정부였으며, 이후 그녀는 그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자 조언자가 되었다. 1794년부터 1797년까지는 그녀를 위해 파우에닌젤에 궁전을 짓기도 했다. 그 외에도 엘리자베트 아말리에 폰 포스 백작부인(1787년), 조피 율리아네 폰 뢴호프 백작부인과 귀천상혼 관계를 맺었다.
5. 1. 결혼과 자녀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와 첫 결혼을 하여 슬하에 프리데리케를 낳았으나, 서로의 외도로 인해 이혼했다.사진 | 이름 | 생일 | 사망 | 기타 |
---|---|---|---|---|
![]() | 프리데리케 폰 프로이센 왕녀 | 1767년 3월 7일 | 1820년 8월 6일 (53세) | 요크와 올버니의 공작 프레더릭과 결혼, 자녀 없음. |
이후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리데리케와 재혼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다.
사진 | 이름 | 생일 | 사망 |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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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 1770년 8월 3일 | 1840년 6월 7일 (69세) | 프로이센 차기 국왕, 5남 5녀 |
크리스티네 | 1772년 | 1773년 | 요절 | |
![]() | 프로이센의 루트비히 카를 | 1773년 11월 5일 | 1796년 12월 28일 (23세) | 2남 1녀. |
![]() | 빌헬미나 | 1774년 11월 18일 | 1837년 10월 12일 (62세) | 네덜란드 빌럼 1세 왕비, 5남 1녀 |
![]() | 아우구스타 | 1780년 5월 1일 | 1841년 2월 19일 (60세) | 헤센 선제후 빌헬름 2세와 결혼, 3남 3녀 |
하인리히 | 1781년 12월 30일 | 1846년 7월 12일 (64세) | ||
![]() | 빌헬름 | 1783년 7월 3일 | 1851년 9월 28일 (68세) | 5남 4녀 |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두 아내 외에도 여러 애인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두었다.
1765년, 프리드리히 2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아내로 엘리자베트 크리스틴을 선택하여 결혼시켰다. 그러나 이 결혼은 4년 만에 서로의 외도로 인해 이혼으로 끝났다.[12] 이후 1769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프리데리케 루이제와 재혼하여 1797년 사망할 때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1769년부터 1782년까지 빌헬미네 엥케가 그의 정부였다. 이후 그녀는 그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자 조언자가 되었다. 1794년부터 1797년까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그녀를 위해 파우에닌젤에 궁전을 지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생전에 두 명의 정부와 더 관계를 맺었는데, 두 관계 모두 귀천상혼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아내인 왕비 프리데리케 루이제가 여전히 살아 있었기 때문에 일부다처제였다. 첫 번째 정부는 1787년 엘리자베트 아말리에 폰 포스 백작부인이었고, 두 번째는 조피 율리아네 폰 뢴호프 백작부인이었다. 빌헬미네 엥케와의 사이에서 낳은 그의 가장 좋아하는 아들은 알렉산더 폰 데어 마르크 백작이었다.[13] 조피 율리아네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브란덴부르크의 율리 백작부인(1793년 1월 4일, 노이샤텔 – 1848년 1월 29일, 빈)은 안할트쾨텐의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 공작과 결혼했다.
6. 사망과 유산
1797년 11월 16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포츠담에서 사망하여 베를리너 돔에 안장되었다.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19]
부자 관계는 우호적이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자신의 부친의 생활 방식을 경멸하였다. 그가 국왕이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부도덕한 것으로 생각한 부친의 통치로부터 즉시 모든 제도를 폐지하였다.
1797년 10월 초,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베를린 궁정 생활에서 물러났다. 그는 다시는 포츠담의 마르모르팔레를 떠나지 않았다. 리히테나우 백작 부인과 같은 몇몇 측근들과 프랑스 혁명 전에 도망친 프랑스 귀족들만이 죽어가는 왕 곁에 모였다. 1797년 11월 9일,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숨 가쁨과 부동으로 인해 더 이상 신체적으로 국정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들에게 정부 업무를 넘겼다. 발작 중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1797년 11월 16일 오전 8시 58분에 마르모르팔레의 "판넬로 된 서재"에서 5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9]
1797년 12월 11일에 사망한 왕의 장례는 간단한 행렬로 거행되었다. 8명의 주요 장군이 관을 운반했다. 설교 후, 예식은 대포 경례로 마무리되었다.[11] 궁정 사회는 6주 동안 애도했으며, 그 기간 동안 궁정과 국가에서 극장 및 음악 행사와 같은 오락이 금지되었다. 추가적인 종교 의식이 거행되었다.
1797년 12월 14일 "베를리니셰 차이퉁"에 게재된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찬사는 다음과 같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프리드리히가 시작한 훌륭한 입법 작업을 완성했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왕으로서의 삶을 영광스럽게 하는 유일한 업적이라면, 그는 그것만으로도 확실히 불멸을 얻어야 한다! 그는 우리의 역사 연대기에 그의 나라를 행복하게 확장한 사람으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프랑코니아와 비스툴라 강변에 사는 우리의 새로운 형제들의 손자들은 그들이 프로이센인이 된 날을 항상 기념할 것이며, 인류 자체는 그를 기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획득은 끔찍한 전쟁의 결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동시대 사람들은 그를 '자비로운 사람'이라고 불렀고, 수 세기가 지난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의 자비로운 행위를 기뻐할 것이다. 그는 후손을 위해 건설하고, 혜택을 주고, 향상시켰다. 그 덕분에 우리 지방 중 일부는 당시까지 우리 나라에 부족했던 포장되고 튼튼한 도로(베스트팔렌, 슐레지엔, 마그데부르크, 브란덴부르크의 차우세)를 얻었다. 다른 곳에서는 운송의 편리함과 운하를 통한 주민들의 이점을 높였다(루핀 지역에서, 불에 탄 도시를 재건한 후). 많은 장소와 지역, 특히 제국의 수도는 그에 의해 상당한 주거 건물과 궁전, 모든 종류의 유익한 기관(예를 들어: 샤리테의 확장, 수의과 학교, 마리엔키르히투름 건설, 여러 문과 도시 성벽 건설, 철 및 기타 다리 건설, 새로운 도시 감옥 건설 등)뿐만 아니라 훌륭한 기념물로 갖춰졌다. 베를린 시민들 사이에 자연에 대한 감각과 예술에 대한 취향이 있는 한, 즉 베를린이 존재하는 한, 가장 아름다운 거리 끝과 가장 아름다운 쾌락의 숲 입구에 그리스 건축 작품에 대담하게 반대하는 웅장한 문을 세운 왕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20]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구 베를린 대성당의 금고에 안치되었다. 죽어가는 왕을 돌본 리히테나우 백작 부인은 더 이상 사망자를 볼 수 없었고 가택 연금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아버지의 경멸받는 연인을 글로고우로 추방하고 그녀의 재산 대부분을 몰수했다.[21]
디터 브로자트는 "Der Berliner Dom und die Hohenzollerngruft"(1985)에서 호엔촐레른 묘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석관이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심하게 손상되었다고 보고했다. 이는 소련의 약탈과 소이탄 피해 때문이라고 한다.[20] 대성당 재건 중, 뼈의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시신 방부 처리를 시사한다. 브로자트는 이 유해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것이라고 믿는다.
7. 가계도
조상 | |
---|---|
아우구스트 빌헬름 (프로이센) 공 | 루이제 폰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
부모 | |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프로이센) | 조피 도로테아 폰 하노버 |
페르디난트 알브레히트 2세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 안토니에트 폰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
8. 자녀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와 첫 결혼을 하여 프리데리케 폰 프로이센 왕녀를 낳았다. 프리데리케는 요크와 올버니의 공작 프레더릭과 결혼했지만 자녀는 없었다.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리데리케와 재혼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 | 생일 | 사망 | 기타 |
---|---|---|---|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 1770년 8월 3일 | 1840년 6월 7일 (69세) | 프로이센 차기 국왕, 5남 5녀 |
크리스티네 | 1772년 | 1773년 | 요절 |
프로이센의 루트비히 카를 | 1773년 11월 5일 | 1796년 12월 28일 (23세) | 2남 1녀 |
빌헬미나 | 1774년 11월 18일 | 1837년 10월 12일 (62세) | 네덜란드 빌럼 1세 왕비, 5남 1녀 |
아우구스타 | 1780년 5월 1일 | 1841년 2월 19일 (60세) | 헤센 선제후 빌헬름 2세와 결혼, 3남 3녀 |
하인리히 | 1781년 12월 30일 | 1846년 7월 12일 (64세) | |
빌헬름 | 1783년 7월 3일 | 1851년 9월 28일 (68세) | 5남 4녀 |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두 아내 외에도 여러 애인과의 사이에서 많은 자녀를 두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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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alogie ascendante jusqu'au quatrieme degre inclusivement de tous les Rois et Princes de maisons souveraines de l'Europe actuellement vivans
https://books.google[...]
Frederic Guillaume Birnsti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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